석면추방운동, 현장을 가다(5) 재일한국인석면피해지역 센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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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추방운동, 현장을 가다(5) 재일한국인석면피해지역 센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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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면추방운동, 현장을 가다(5)


"중피종은 불치의 석면암이 아니다, 치료법을 개발하라" 일본 석면피해자운동의 새로운 흐름 -

중피종서포트카라반대(中皮腫サポトキャラバン隊)운동


2026년8월10일 최예용 


한일석면피해자운도교류 방일 6일차: 6월30일 화요일, 오사카부 센난 방문


시노상을 추모하며


이번 방일프로그램을 짜면서 오사카부 센난에 가면 꼭 해야한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시노상을 모신 곳에 가서 묵념을 올리고 늦었지만 조문을 하는 거였다. 시노상은 내가 센난에 올때마다 만난 센난석면시민의모임의 핵심멤버다. 본인이 석면환자는 아니지만 시민모임의 궂은 일을 하는 분이었다. 한국에서 열린 국제심포에도 왔었다. 그런 시노상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작년엔가 듣고 많이 아쉬웠다.


석면피해자운동은 석면환자와 가족 그리고 그들을 돕는 '조력자'들의 운동이다. 나같은 전업활동가도 있지만 그냥 시민으로서 돕는 분들도 많다. 짬을 내서 활동을 돕는 경우도 있지만 시노상처럼 퇴직한 경우는 거의 전업활동가 못지 않은 활동력을 발휘한다.


이에 대해 가타오카가 한 말이 있다. "한국이나 일본의 석면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두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무대뽀다. 그냥 밀어붙인다. 유오카 센난시민모임대표가 그렇고 한국의 최예용 소장이 그렇다. 두번째는 경제적 문제에서 비켜나 있다. 유오카는 자본가의 집안이고 최예용은 집안 경제를 책임지지 않는다." 모두들 웃으며 "맞다 맞다" 한다. 나는 여기에 한가지를 추가한다. 세번째는 시간을 많이 내야한다. 석면일을 자기가 하는일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시노상이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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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6월30일 필자일해은 일본 오사카부 센난시의 시노상 집을 방문해 생전에 센난 석면피해자들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고 시노상을 추모했다> ⓒ 최예용 


시노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센난에 올때마다 재일한국인 석면피해자들의 근황을 묻고 그랬기때문에 시노상과는 인사만하고 특별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나에겐 그가 센난석면시민모임 자리에 늘 함께하며 일을 도운 분으로만 기억된다. 세상은 시노상처럼 조용히 늘 옆에 있으며 힘을 보태는 사람들의 존재로 굴러가고, 그들의 부재할 때 비로서 그들의 존재감을 빈자리를 보며 깨닫는다. 센난석면시민모임이 세운 <센난석면의비>와 <센난석면자료관>을 안내하는 브로숴에 시노상의 휴대폰번호가 안내되어 있다.


일본 집들이 다 그러하듯 시노상 부인이 안내한 곳은 시노상과 그의 부모를 모신 거실이다. 부인은 시노상의 화장 유골을 거실 한쪽에 모셔놓고 기리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추모의 예를 표하고 부인으로부터 어떻게 암투병을 했고 생을 마감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시노상은 기차를 좋아해 직장의 휴가때마다 일본은 물론 세계를 다니며 기차를 타보고 사진찍는 취미를 가졌단다. 그의 집이 기찻길 바로 옆인데, 기차와 기찻길이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땅을 골라서 집을 지을 정도였단다. "저 헬멧은 왜 저기 있나요?" 시노상 유골함 옆에 놓인 헬멧을 가리키며 이성진이 물었다. 시노상이 늘 타고다니던 작은 바이크의 헬멧이라고 부인이 답한다. 시노상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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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6월30일 일본 센난시 고 시노상 집에서 바라본 센난 시내방향 모습. 일본에선 일반 주택의 지붕에 석면슬레이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창고의 지붕과 벽체에는 거의 석면슬레이트를 사용했다> ⓒ 최예용


<센난석면의비>와 <센난석면기록관>


센난을 처음 방문한 이성진에게 <센난석면의비>와 <센난석면자료관>를 안내했다. <센난석면의비>는 2015년 4월 유오카 석면시민모임 대표의 집 바로 옆 공지마당에 세워졌다. 석면공장들이 많이 있던 곳이자 전부터 동네사람들이 자주 모여 모임을 했던 곳이다. 2014년 센난국가석면소송의 승리를 기념해 <센난석면 국가배상 청구소송 원고단>, <센난 석면피해와시민의모임>, <센난 국가배상 승리회>, <오사카 석면 변호단> 등 4개 단체가 세운 기념비다. 2015년 석면의비를 세우는 기념식에 한국석면피해모임대표 정지열 선생과 함께 왔었다. 오늘은 이성진에게 석면의비 옆에 설치된 안내 현판의 일본어 내용을 떠듬떠듬 읽으며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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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 센난의 석면석비와 석면자료관을 소개자료 (한글번역기 사용)> ⓒ 최예용 


200여개의 중소규모 석면방직공장의 위치지도 현판에 새겨져있다. 일본에서 '석면마을(이시와타마을)'로 불리며 100여년간 가동된 곳으로 구보타쇼크를 계기로 동네에 많았던 석면병피해의 책임을 물어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고 8년반의 투쟁 끝에 승리해 이를 기념한다는 내용이다.


" 오사카부 센난 지역은 메이지 말기부터 석면섬유산업이 번성했으며, 전쟁 전에는 군수에, 전후에는 산박,자동차,철강 등에 내열,내마모,자재를 공급하는 나라의 버팀목이었다. 이곳 센난 신타치 지역은 석면공장이 모여있는 석면방직산업의 중심지로 전쟁이전 '이시와타(석면)마을'로 불렸다. 한세기동안 석면생산이 지속된 결과, 지방출신자, 재일한국인을 포함한 노동자, 사업주, 가족, 주민 사이에서 석면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센난석면피해 100년의 역사이기도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묻혀버렸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채 확대됐다. 국가는 1937년부터 시행한 대규모 석면건강영향에 대한 실태조사와 전후 지속조사에 따라 센난의 석면피해실태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석면피해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한 의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경제성장을 우선시하고 유효한 규제와 대책을 세우지 않고 방치했다. 2006년5월 피해자와 유족이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소송에 나셨다.


재판에서 끈질기게 싸웠다. 중간에 패소판결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2014년10월9일 최고법원(대법원)은 일본에선 처음으로 석면재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2015년 1월 후생노동성 장관이 센난 이즈미를 방문해 원고들 앞에서 사과했다 8년반에 걸친 재판 승리를 기념하고, 무고하게 떠난 이들의 위령과 모든 석면 재앙 근절을 기원하며 석면산업의 피해의 원점이 된 신다치에 '센난 석면의 비'를 세운다. 205년4월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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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 오사카부에 있는 센난시는 과거 ‘석면마을’이라고 불린 곳이다. 일본의 석면방직제품 수요의 80%를 공급했던 곳이지만 재일한국인을 포함해 많은 석면피해자가 발생했다. 8년반의 투쟁 끝에 2014년 국가의 책임을 법정에서 인정받았다. 이를 기념해 ‘센난석면마을’ 한가운데에 기념석비를 세웠다.> ⓒ 최예용 


지난번에 왔을 때는 못봤었는데 기념석비 뒤의 작은 나무 옆에 다른 작은 석비가 있었다. "신록을 들이마시며, 커져가는 슬픔이, 숨을 갈구하는 사람의 존재를 알기 위해" 호흡질환인 석면병 환자들의 마음을 표현한 싯구다.


<센난석면기록관>은 <센난석면의비>에서 한집 건너에 자리잡고 있다. 정식명칭이 <아뜰리에 센난석면의관>인데 설립자 카지모토 이츠오씨는 안내 브로숴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아버지 카지모토 세이지는 1953년 이곳에서 진료서를 열면서 동시에 석면의 위험성을 알렸습니다. 해외에서 석면 관련 원서를 주문해 받아 그 의견을 계속해서 정부부처와 제조업체에 전달했습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40년동안 '이시와타(석면) 카지가이'라고 불리며 석면의 위험성을 경고해왔습니다. 그 병원 부지에 석면자료관을 세워서 유품과 문서 등을 전시합니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기 바랍니다."


<센난석면의관>에는 카지모토 세이지 의사가 사용했던 청진기, 혈압기와 왕진다닐 때 늘 쓰던 바이크 헬멧, 석면에 대해 적어놓은 손글씨 문서, 해외에서 구입한 석면관련 학술문헌, 석면방직제품, 국가소송과정의 소송자료, 투쟁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센난국가소송할때는 센난와 한난시의 관계자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기념석비와 아뜰리에 만들고나서도 시 관계자들이 와서 배우고가고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담당자가 계속 바뀌고 관심이 시들해지는 형편이다. 해서 시립 석면기록관을 만들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시에 보낸 공문을 보여주는 카지모토 이츠오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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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 오사카부 센난시에 있는 센난석면자료관 ‘아뜨리에 센난석면의관’ 내외부 모습, 2026년6월30일 촬영> ⓒ 최예용 


<센난석면의관>은 일본 전역 26개 공해문제자료관들의 네트워크인 '공해자료관네트워크'에서 13번째로 소개되고 있다. "2013년 12월 결성된 공해자료관은 공해지역에서 공해 경험을 전달하려는 시설이나 단체로 전시기능, 아카이브(자료)기능, 교육기능 증 하나를 담당하며 건물공간을 갖출 필요는 없고 운영주체도 국가,지방자치단체,학교,NPO(시민단체) 등 다양합니다"라고 브로숴에 소개되어 있다. "각지의 공해자료관에 가보자"라는 구호와 함께 소개되고 각각의 QR코드로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안내된다. 눈에 띄는 몇개만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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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본 전역 26곳의 공해문제를 소개하는 ‘공해자료관 네트워크’ 소개자료(자동번역기사용> ⓒ 최예용


1번 원자력화재피해연구관(후쿠시마 핵참사 관련),

2번 니가타 현립 환경과인간의 후레아이관(니가타 미나마타병 관련),

4번 아시오 광독사건 다나카 쇼조 기념관 (군마현 광산독성피해사건),

7번 전국공해피해자총행동실행위원회(도쿄, 매년 6월5일 세계환경의날에 동경행동을 주관하는 곳?),

9번 도야마 현립 이타이이타이병 자료관,

11번 요카이치 공해와 환경 미래관,

12번 아오조라재단부속 서요도강,공해와환경자료관(에코뮤즈, 오사카),

13번 아뜰리에 센난석면의관,

14번 아마가사키 시립 역사박물관 "아마가사키 아카이브즈"(효고현),

19번 오시마시 카네미 중독피해 자료전시코너(나가사키현),

22번 쿠마모토학원대학 미나마타학 현지연구센터,

23번 미나마타시립 미나마타병 자료관,

24번 환경부국립 미나마타병 종합연구센터,

25번 미나마타병 센터 소시샤(역사고증관) 등이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무기참사 관련은 안보이지만, 후쿠시마핵참사, 니가타 미나마타병, 구마모토 미나마나병, 이타이이타이병, 요카이치공해, 센난석면히해, 아마가사키 구보타쇼크, 카네미중독 등 일본의 주요 공해사건들이 망라되어 있다.


한국 반코의 경우, 정지열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충남 홍성에 가칭 "충남 석면광산피해기록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고 형식과 내용에 대해 여러차례 논의를 한 바 있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전체적으로 볼때 지난 50여년간 공해사건, 환경문제들이 많았는데 각 기록관 혹은 자료관이 해당 지역에 있을까? 거의 없지 싶다. 만약 있어야 한다면 어느 지역 어떤 사건들일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내친김에 함 나열해본다.


울산 <온산병> 자료관 (1980년대 초중반 온산공단 공해피해사건)

경북 구미, 대구, 울산, 마산, 진주, 부산 낙동강일대 <두산전자 페놀사건> 1991년4월

포항, 울산, 군산 <해양투기 기록관> (2016년까지 50여년간 육상의 유기성폐기물 수백만톤을 3개 지정해역에 해양투기한 문제, 전국 10여개 항구에 해양투기 전용선창에서 전용선박이 운영되었다)

강원 영월 <동강보호운동 동강댐 반대운동> 2000년?

전북 부안, 김제 <새만금 갯벌매립반대 삼보일배운동 기록관> (2003년 3월 부안에서 서울까지 진행된 삼보일배운동)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어온 <탈핵운동 기록관>,

- 전남 영광 1988년 영광핵발전소3,4호기 반대운동,

- 충남 안면도 1989년? 반핵항쟁

- 대만 핵폐기물 북한반입반대운동 1995?~

- 인천 굴업도 1994~ 핵폐기물처리장 반대운동

- 경북 영덕 2015? 핵발전소신규건설 반대운동과 주민투표운동

- 부울경 2016? 고리핵발전소 폐쇄운동

- 부안, 고흥 등 전국 다수지역에서의 핵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

전남 여수 <호남정유 씨프린스호 기름유출사건 기록관> 1995년?

충남 태안 <삼성중공업에의한 허베이스피리트 유조선 기름유출참사 기록관> 2007년?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한반도대운하 및 4대강사업 반대운동과 녹조라떼> 2008~2013 집권 이명박정권시기 집중

서울 및 전국, 2016년 <가습기살균제참사 옥시불매운동>, <피해기록관>

충남 홍성,보령 <석면광산피해 기록관>

부산 <제일화학 등 석면방직산업피해기록관>

전국 <초미세먼지 환경보건피해기록관> 2017~ 초미세먼지 환경문제와 관련정책기록

전남 광양만 등 국가산단지역 환경문제 기록관

서울 노원구, 마포구 등 <쓰레기소각장 다이옥신문제 등 기록관>

경북 봉화, 안동 등 <영풍석포제련소 폐쇄운동> 진행중

일본 후쿠시마 핵참사와 핵폐수 해양투기 반대운동, 2011년 & 2023년8월부터


아마 빠트린 사안들이 많을 거다. 이중에는 지금도 진행중인 사안들도 많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당 지역의 환경단체 혹은 시민사회단체가 오프라인 혹은 온라인으로 자료관,기록관을 만들고 이들을 묶어서 전체적으로 소개하고 알리는 활동이 필요해 보인다. 개발과 오염에 맞서 어렵게 싸워 지켜온 소중한 기록들을 잘 남기고 공유해야 반복되곤하는 공해문제, 환경문제를 효과적으로 막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번 방일 일정을 앞두고 많이 바빴다. 벌써 2년전인 2024년 4월에 센난을 방문해 바로 이자리 아뜰리에에서 10여명의 석면피해자와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적 있다. 한국애서 가장 석면피해가 많은 충남 석면광산지역과 부산에서 각각 10여명씩 석면피해자들과의 인터뷰기록을 같이 정리해 모두 30여명 한일의 석면피해기록을 만들어 자료집이나 책으로 내보겠다는 기획을 진행했었다. 그해 3곳에서 인터뷰는 진행했는데 제대로 녹음을 풀어서 정리하지 못하고 가습기살균제참사, 엘지화학인도참사 등 다른 일들을 핑계로 2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어서 인터뷰 녹음을 정리해야 하는데'하는 마음의 짐이 무거웠다.


그러다가 올해초 일본 방문 이야기가 나오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책출판은 고사하고 인터뷰기록 초안도 못만들까봐서다. 2년전 인터뷰를 위해 센난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걸 생각하면 '이대로 다시 뵐 수 있을까' 싶었다. 한 달 가량을 집중해 녹음을 풀어 일본 출발 하루전까지 겨우 정리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풀어내는 글이 아니고 단순히 묻고 답하는 식의 글로는 책출판은 어림도 없었다. '이대로 가져가서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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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3년 4월 일본 센난석면시민의모임 대표 유오카씨가 유오카석면공장에서 일했던 재일한국인 노동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 최예용 


인터뷰기록 초초안을 묶은 인쇄물을 건네며 센난시민모임 분들에게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약속을 못지켜 얼굴이 화끈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단순히 석면피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만으로는 책이 되기 어렵다. 석면이 뭔지, 왜 위험한지, 우리 주변 어디에 어떻게 석면공해가 존재하는지, 왜 일본 센난인지 등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써야 독자들이 읽는다. 그게 힘들다" 나의 고충을 설명했다.


한 10여년전에 그 이전 10여년동안 집중해온 석면추방운동의 이야기를 정리한 적 있다. 하지만 책으로 출판하지는 못했다. "글쓰는 사람이 1인칭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말하는 식으로 다시 정리해야 한다. 당신이 직접 겪은 석면이야기를 하나하나 생생하게 들려주어야 읽힌다. 다시 써봐라" 내가 정리한 두꺼운 원고를 다시 써보라는 출판관계자 조언은 맞는 말이었지만 다시 글을 쓰는 일은 엄두를 못내고 덮어두었다.


"내년 2027년 4월 센난국가소송승소 13주년까지는 어떻게 해볼게요"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센난시민모임 분들이 웃으며 "부담스러울까봐 인터뷰기록에 대해 최예용씨가 말을 꺼낼때까지 우리가 먼저 물어보지 말기로 했었다."라고 한다. 으으으~ "2년뒤인 2028년에 반코 20주년이 된다니 그때 서울에 가겠다. 그때까지는 마무리해주기 바란다" 후유~ 다행이다. 땀이 삐질 흐르는 자리였다.


센난시민의모임과의 식사모임


"이성진씨를 보니 한국사람이 일본사람보다 확실히 잘 생겼다" 20여명의 센난시민의모임 회원들이 센난의 마을식당에 모였다. 반코 방문객을 환영하고 자신들의 정기모임을 겸한 자리였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성진 차례가 끝나자 팔순을 넘긴 유오카 카츠요시 센난석면시민의모임 대표가 큰소리로 말해 모두가 웃는다.


이 자리에는 두명의 재일한국인 석면피해자가 같이 했다.


먼저, 고야마 사치코 씨, "결혼해서 센난에 처음 와서 한 일이 슬레이트를 분쇄해 석면가루로 만드는 일이었다. 마스크는 있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남편은 폐암을 사망했다. 세월이 흘러 석면사용이 금지되었지만 그건 사람이 할일이 아니었다. 산재인정을 받긴했다. 자녀들은 석면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말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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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6월30일 일본 오사카부 센난에서 재일한국인 석면피해자 고야마 사치코씨가 자신의 석면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최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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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6월30일 일본 오사카부 센난에서 재일한국인 석면피해자 마츠시마 카나씨가 자신의 석면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최예용


다음은 마츠시마 카나 씨, "올해 83세다. 12살때부터 센난의 석면공장에서 일했다. 지금 양쪽 폐에 흉막비후가 있다. 걸을 때마다 숨이 차다. 산재신청을 했지만 석면노출흔적인 플라크만 보인다며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석면피해구제법에서도 불인정됐다. 이대로 고통속에 죽어야만 한다." 유오카 시민모임대표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사례가 마츠시마 카나다. 비슷한 연배로 석면사업체의 자녀로 어려움없이 자랄때 마츠시마는 재일한국인으로서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사실을 나중에야 그것도 구보타쇼크로 인해 센난지역의 석면문제에 대해 눈을 뜨고 주변의 석면피해사를 찾아나서고 나서야 마츠시마 카나의 삶을 알게됐다. 201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마츠시마와 함께 참석한 유오카는 "센난석면문제는 재일한국인의 석면피해문제다"라고 강조하며 관심을 촉구했다. 마츠시마 카나의 사례에서 석면피해, 재일한국인차별문제, 여성으로서의 가부장제피해라는 사회문제가 모두 읽힌다. 식사자리가 끝나갈무렵 그녀가 다가와 무언가를 내민다. 커피사탕과 과자가 든 봉투다. "멀리 한국에서 왔는데 이런거라도 주고싶다" 자주 센난을 찾아 안부를 묻고 관심을 표하는게 고맙다는 뜻일게다. 일본사회에서 사는 그녀의 삶은 가난하고 석면피해를 인정받지 못해 서러울지언정 동포를 향한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진하게 전해진다.


식사를 겸한 술자리여서인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꽃피웠다. 센난소송을지원하는시민모임의 일원이라는 한 참석자가 한국에서 윤석열이 계엄을 저질렀지만 잘 이겨내는 걸 보고 감탄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일본은 자민당 일당집권이 너무 오래 이어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센난시의회의 시의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꽤 젊어 보이는 한 참석자는 소속당이 공산당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시노상 집의 담벽에 붙은 포스터가 '전쟁반대 No War'라는 제목의 일본공산당이 만든거였다. 일본의 정치상황과 정당성격은 잘 모르지만 좌파로서의 공산당이 꾸준히 전국 자치단체 기초 및 광역의회에 진출해 일정한 세를 유지하는 듯 했다. 센난의 경우 아마 변호인단도 그렇고 진보정당 사람들이 석면국가소송의 과정을 적극 지원했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그때 너무 일찍 무장투쟁을 중단했었다" 68세대인 유오카 선생이 가슴속의 회한 같은 거를 힘들여 꺼내 한마디 던졌다. 그러곤 "최예용 씨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봤나요?"하고 묻는다. 나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다 급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네, 읽어보긴 했어요.." 하며 얼버무렸지만 사실 제대로 읽어봤던가 싶다.


한국 시민사회에선 흔히 일본의 시민사회에 대해 '생협운동이 활동한 편이고, 지방자치단체엔 공산당 등 다양한 정치적 색채가 존재하지만 정작 중앙정치권력을 바꿔내지 못하고 매우 보수적이다'라고 평가하곤 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자민당 장기집권이란 측면에선 맞는 평가일 수 있지만, 수많은 사회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활발한 '시민모임' 방식의 운동이 전개되는 근저에 유오카 선생같은 68세대가, 시노상같은 분들이 일본사회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보다 나은 삶과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맞다고 하기 어렵다. 석면문제를 포함한 일본의 공해문제의 해결과정에 진보적인 일본시민사회가 그리고 수많은 깨어있는 일본시민들이 보이는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해내고 있는 걸 이번 방일과정을 통해 분명히 확인한다.


"이성진 씨는 일본이 군사적으로 무장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성진의 맞은편에 앉은 나카무라 선생이 질문을 건넸다. 그녀는 센난석면시민모임의 모든 활동을 만화로 기록하는 만화가다. 센난국가석면소송 과정을 만화로 기록해 책도 냈고 관련 학회로부터 상도 받았다. 일본이 만화천국이라는걸 느끼게 해 주는 분인거다. "나쁘지 않은거 같아요. 요즘처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도 이란을 공격하는 걸 볼때 모든 나라가 자국의 군사력을 갖추는건 필요한 일 아닌가요?" "..." 기대하지 못한 답이었을까. 한참을 빙그레 웃던 그녀가 말한다. "일본은 2차대전 패망후 전쟁을 하지 않는 비무장 평화헌법을 만들었어요. 절대 전쟁을 위한 무장을 강화해서는 안된다고 믿어요." 사회와 역사에 대해 세대간에 큰 차이를 보이는건 어쩌면 당연하다. 60~70년대의 일본사회와 70~80년대의 한국사회가 겪은 격랑의 사회변화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관점과 사회를 보는 눈을 분명하고 살아온 사람들과 91년에 태어나 2010년 18세에 고3 마치자마자 석면암에 발병해 투병의 삶을 살아온 평범한 20-30세대인 이성진이 사회를 보는 눈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나 석면문제라는 같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곳에 사회, 정치, 경제, 역사, 외교 등 모든게 보인다. 석면추방운동 석면피해자운동이라는 같은 눈으로 본다. 그걸로 충분하다.



방일 7일차: 7월1일 수요일, 오사카지역 중피종카라반 미팅과 귀국


방일 마지막날이다. 가타오카의 차로 조금은 한적한 동네의 미팅장소를 찾아갔다. 전형적인 일식주택인데 자치단체의 커뮤니티 공간인듯하다. 2016년경 중피종카라반운동이 시작된 곳이 오사카다. 2005년 구보타쇼크를 발굴해낸 사람들이 오사카의 산업보건운동가 가타오카와 오사카의 석면산재유족 후루가와다. 오사카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먼저 산업보건운동단체가 만들어져 5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다. 오늘 중피종카라반운동의 멤버인 이치로 오노에와 사카타 케조 두 사람을 만난다.


이치로 오노에 씨는 MSC 그러니까 중피종카라반운동의 운영위원 명함을 주며 자신을 소개한다. 2017년 우측 폐에 중피종이 발병했고 항암과 면역억제제로 9년째 투병중이다. 수술은 하지 않았단다. 옵티보 약제를 43회 처방받았는데 후유증이 있다. 뇌경색, 3년전부터 팔꿈치신경통이 있다. 1955년생으로 올해 71세다. 직업은 빌딩의 내장재를 관리하는 건설업체에서 일해왔다. 그러다보니 건설노동자를 고용해 석면건축자재를 설치하거나 수리하는 일을 많이 했다. 산재 인정을 받았고 국가와 석면건축회사를 상대로한 소송에서 모두 승소했다.


사카타 케조 씨는 2022년 12월 우측폐에 흉막중피종이 그리고 동시에 복막에서도 중피종이 발병한 특이한 사례다. 동시에 진단이 나와서 어디가 원발이고 어디로 전이된건지 모른단다. 일주일전에 알림타 주사를 맞았다. 계속 항암중인거다. 1981년생으로 올해 45세다. 19세때부터 목수일을 시작했다. 당시 훈련받을때는 석면자재가 있는줄 몰랐다. 건물 리모델링일을 많이 한다. 석면슬레이트 뿐 아니라 외벽이나 천장재에도 석면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건물 지붕이 이어지는 처마에도 내화재인 석면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재는 인정받았지만 국가상대소송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유를 물으니 아직은 필요를 못느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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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7월1일 오사카의 석면암 중피종 피해자 이치로 오노에(가운데)와 사카타 케조(왼쪽)> ⓒ 최예용 


이성진이 사카타의 자세한 항암과정을 물었다. 옵티보 14회, 야보이 6회, 식스플라틴 6회 알림타는 3회 받았고 할보플라틴?과 알림타를 지난주에 받았다. 빈혈증상이 있단다. "사카타 씨는 항암환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근육맨으로 건장해보인다" 이성진이 말을 건넨다. "항암하면서 20kg이나 살이 쪄서 지금 85kg다. 아마도 일을 안해서 그런거 같다"며 웃는다. 자신의 경우 항암하면서 입맛이 없어지고 구역질이 많이 났었다고 이성진이 말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고 거의 못먹었다. 억지로 먹고 있고 하루 1만번 걷고 근육운동을 계속한다. 서핑(바다파도타기)가 취미인데 가능한 나가려고 한다" 항암 치료를 하는 석면암 중피종 환자가 서핑을 즐기는 장면이 잘 상상이 안되는데, 내 앞에 그런 사람이 있다!


이치로 오노에 씨의 경우, 격월로 검사를 받고 있는데 항암후유증인지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현상이 나타나 통증완화치료를 받는다. 스테로이드제의 부작용으로 식욕이 늘어서 5kg 체중이 늘었다. 평소에는 술마시고 테니스나 골프치며 소일한단다. 처음 효고의대병원에서 중피종 진단을 받았을때 육종형이라서 수술도 못 하고 여명이 6개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부인에게 부고 등의 일처리를 모두 넘기고 항암에 매달렸다. 처음 식스플라틴 치료를 1년하고 옵티보 치료를 하니 종양이 작아졌다. 친구랑 여행을 가도 "여기 좋은데 다음에 다시 오자" 그런 말을 못한단다 내일약속 정도는 하지만 먼 훗날의 약속은 못한다고… 중피종카라반활동은 효고병원에 입원했을때 미기타가 찾아와서 처음 만났다. 이후 카라반 모임에서 구리타도 만났다. 미기타가 하루 서너번씩 올리는 블로그 그을 계속 살펴봤단다. 중피종 발병 초기 3년동안에는 아내와 딸 두명이 서로 경쟁하듯 도와줬는데 지금은 "죽는다고 사기친다"며 많이 달라졌다고 웃는다. 손주들 보는 재미로 산단다.


사카다 케죠 씨의 경우는 병원에서 처음엔 잔여수명이 3개월이라고 했다. '그냥 놔두면 3개월, 항암해도 1년정도'라고 했다. 4년째 살고 있지만 중피종은 치료가 불가능한 암이라고 느낀단다. '사는동안만이라도 즐겁게 살자'는 생각만 한단다. 다행인지 종양은 큰 변화가 없다. 1mm 정도 줄었다가고 1mm정도 늘었다고 하니 현상유지상태라고 본단다. 증상은 있는데 계단오르는게 힘들고 숨이차다. 인터넷에서 센난석면모임을 찾아서 카지모토시와 통화했더니 미키타를 소개해줘서 중피종카라반을 알게됐단다. 결혼해서 부인이 있는데 부인이 의연해서 암진단 전과 후에 달라진게 하나도 없다고 웃는다. 산재보험에서 나오는 급여는 충분하냐고 물었더니 옛날 건설노동자로 일할 때의 급여수준인 월 20만엔 정도만 나오지만 부인도 직장다니고 해서 크게 신경쓰지 않는단다.


중피종이 석면에 의해 발병하는 불치의 희귀암이라지만 언제까지 불운을 탓하며 스트레스 속에 죽기만을 기다릴것인가. 미기타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중피종 동지회'로 만들고 '중피종카라반'도 만들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하고싶은 말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하면서 '중피종을 치료가능한 병으로 만들자'는 환자 공동의 요구사항을 모아 사회에 던지는 것, 그것이 일본에서 한창 진행되는 중피종카라반 운동이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길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정식을 먹었다. 일본에 도착한날과 떠나는 날을 포함해 7일내내 비가 내렸다.


"어제 나고야 카라반 모임때 유족들에게 환자가 투병할때 그리고 유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하더라" 가타오타가 식사하며 말한다. '그러게, 처음 보는 분들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물어보는게 쉽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라반 사람들은 만나서 속 깊은 곳의 이야기까지 허물없이 다 나누나 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9월 폐암학회때 일본 카라반 회원들이 방한할때까지만이라도 한국에서 중피종 환자를 찾고 조직하는데 집중해주었으면 한다" 가타오카가 당부한다. '돌아가면 가습기살균제 등 다른 현안 문제들을 다루느라 석면피해자 조직하는 일이 또 뒷전으로 밀릴걸 알고 당부하는 거구나' 싶다. 한편 한국에서의 석면피해자운동을 활발하게 조직하지 못하는 데 대해 같은 석면운동가로서 미안한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론 한국에서 석면피해에 대한 산업보건운동이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 마음이 무겁고 그랬다.


이번 방일을 준비하면서 2년전의 인터뷰에 대해 거의 한달간 시간을 내서 센난과 한국에서의 석면피해자 인터뷰 녹음을 풀어 기록을 만들었고, 일주일간의 방일 프로그램을 마쳤다. 돌아와 7월2일부터 오늘 7월15일까지 딱 2주일동안 일주일간의 방일 활동을 글로 기록하는데 집중했다. 모든게 처음 생각한거보다 2~3배 더 시간이 걸린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얻은 자료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나름의 문제점을 정리하는 과정이었고 거의 20여년간 매달려온 석면추방운동과 석면피해자운동의 경험과 기억을 떠올리는 시간이어서 힘들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과정이었다. 방일 프로그램에서 만난 모든 석면피해자와 운동가들의 건투를 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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