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4 경향신문] "화학물질 공포에 공무원들은 늘 '괜찮다'만... 시민이 힘 모아 싸워야 합니다"…
최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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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3 17:23
6년.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51)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에 매달려온 시간이다. 대학생이던 1985년 울산의 온산공단에서 배출된 오염물질 때문에 일어난 ‘온산병’ 문제에 뛰어들면서 생활 주변 화학물질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주민들이 이타이이타이병 초기증상과 유사한 질환을 겪고 결국 4만명이 이주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9600㎞ 떨어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시민들이 또다른 화학물질과 싸우고 있었다. 마크! 로페즈(mark! Lopez·31)는 제련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납’ 공포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2008년 대학을 마친 후 고향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긴 싸움은 성과가 있었다. 올해 한국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2015년 LA에선 고농도 납 배출 제련소가 문을 닫았다. 서로 다른 곳에서 독성물질에 맞서 분투해 온 두 환경운동가가 12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운동연합 마당에 마주앉아 고민을 나눴다. 두 사람의 생각엔 공통분모가 많았다. 화학물질 감독·관리에 실패하고도 책임을 외면하는 관료들, 인과관계조차 확인하기 힘든 건강 피해, ‘돈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까지, 짧은 만남에서 두 사람은 여러번 맞장구를 쳤다. 2016년 환경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상을 받은 로페즈는 환경재단이 주최하는 그린아시안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한국을 방문했다.
■‘괜찮다’고만 하는 관료들...‘국가란 무엇인가’ 고민
LA 동부에 사는 로페즈는 8살 무렵 어머니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집 부근에 다 쓴 배터리를 용광로에 녹여 납을 추출하는 엑사이드(Exide)사의 제련소가 2000년부터 돌아가고 있었다. 온 동네가 납으로 범벅이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로페즈 가족은 주 정부 환경보호국 관리들과 공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공무원들은 로페즈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말했다.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어요. 건강에 우려될 만한 것이 전혀 없어요.”
할머니는 “그런데 우리는 왜 보호장비를 입고 있죠?”라고 물었다. 말을 잃은 공무원들에게 할머니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마스크, 보호복, 장갑을 낀 우리와 달리 공장 노동자들은 반팔 옷에 헬멧만 쓰고 있네요.” 엑사이드와의 싸움에 대해 들려달라는 질문에 마크는 이 에피소드부터 들려줬다.
최 소장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기업과 싸우는 것보다 관료들과 싸우는 게 더 힘들었다”고 했다. “한사코 자기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태도의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로페즈도 말했다. “정부는 자신의 실패를 확인하려는 조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미국 LA동부지역의 납 오염 실태를 알리고 제련소 퇴출과 정화작업을 이끌어낸 마크! 로페즈. 그는 지난해 환경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2000년대 들어 LA 동부에선 해마다 당국이 납 농도를 조사하지만 단 한번도 기준치를 넘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 정부는 방관했다. “결국 우리가 해결책을 갖고 정부에 제시를 해야 하더라고요.” 최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면 딱 그만큼만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발, 한발씩 왔죠.”
로페즈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지역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납과 비소의 피해를 알렸다. 주 의회와 주 정부가 움직였다. 주 정부의 심층조사 결과 모든 건물의 지붕에서 기준치의 52배 가량의 납이 검출됐다. 2015년 제련소는 문을 받았다. 지난해 주 정부는 정화비용 1억7660만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30여년 납 피해, ‘입증’은 첩첩산중
가습기살균제가 몇 년 안 되는 기간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LA의 납은 주민들의 삶을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잠식해왔다. 로페즈의 고향은 하루 6만여대의 대형 디젤차량이 오가는 곳이다. 화학물질인 크롬을 다루는 공장들도 흩어져 있다. “여러 곳에서 뿜어져 나온 납 같은 독성물질이 주민들 몸에 30년간 쌓여왔으니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로페즈는 그래도 분투하고 있다. 그가 소속된 ‘환경정의를 위한 동부커뮤니티’(EYCEJ)는 주민의 혈중 납 농도와 건강 피해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다.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납이 주민들의 충동제어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학계에서는 납 중독이 특히 어린이들의 학습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로페즈는 “이 지역의 학업성취율이 낮고 범죄율이 높은 것에도 납 중독이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고 했다. “임신 6~9개월차의 태아는 어머니 몸 안의 납을 칼슘으로 오인해 흡수한다고 합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납에 중독되는 거죠.”
동부커뮤니티는 유아의 젖니에서 나타나는 납 농도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주민들의 뼈에 축적되는 납 농도를 보여주는 ‘나이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주 정부가 납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1만 가구를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로페즈는 수십만 가구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본다. 오랜 기간 독성물질에 치명적으로 노출된 것은 확실한데,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기 위해선 가야할 길이 첩첩산중이다. 로페즈의 얘기를 듣고 최 소장이 말했다. “우리도 1994년 가습기 살균제가 시판된 후 17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무도 몰랐어요. 지금도 생활화학제품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죠.”
1985년 울산광역시 온산지역의 ‘온산병’ 문제에 뛰어든 후 줄곧 화학물질 피해 문제에 매달려 온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가습기 살균제 참사 뒤에도 한국사회는 여러차례 화학물질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한다. 로페즈의 할머니가 제련소에서 들었던 말과 똑같다. 달걀에서 금지된 살충제 성분이 나왔는데도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하루에 2.6개씩 평생 먹어도 걱정 없다”고 했다. 일회용 생리대를 쓰다가 부작용이 생겼다는 여성이 3000명이 넘는데 식약처는 민간 연구진의 유해물질 시험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만 한다.
■해법은 시민들의 ‘대화’에 있다
현대과학은 온갖 합성 화학물질을 만들어냈다. 소비자들은 그런 물질에 에워싸여 사는데,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규명하기는 힘들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입증되지 않은’ 피해는 시민이 감내할 몫이 된다. 국가의 책임을 넘어, 두 운동가는 우리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와 ‘돈을 우선하는 사회’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찾았다. “할머니 세대는 캔에 든 먹거리 없이도 잘 살 수 있었잖아요. 살아가는 방식이 세월을 거치면서 완전히 달라졌어요.” 자본주의는 시민들에게 모든 것을 사서 쓰는 생활방식을 유도했고, 그 결과 생활화학제품이 넘쳐나게 됐다는 게 로페즈의 설명이었다.
시민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로페즈의 답변은 뜻밖에도 단순했다. “이웃,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라”고 했다. 그는 집집마다 다니며 주민들을 묶어냈고 이들의 목소리로 주 정부와 정치인들을 압박했다. 지역공동체는 그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유일한 통로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페즈의 이름은 ‘mark!’다. 대문자 M 대신 소문자 m을 쓰고 느낌표를 붙인 것은 자본주의에 맞서겠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자본’이라는 뜻도 되는 대문자(Capital)를 이름에서 없애버린 것이다. 그는 “모든 운동은 평범한 이들로부터 시작됐다”면서 “이웃들과의 관계를 튼튼히 쌓으면 화학물질을 비롯한 여러 모순들을 일상에서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최 소장은 “돈을 우선하는 한국사회”의 방향을 틀자고 제안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기업들이 단 3억원이 드는 독성시험 비용을 아끼면서 저지른 일”이라면서 “한국은 이제 상당한 부를 쌓았으니, 돈보다는 안전으로 이 사회의 방향과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계속 연대하자”라는 약속을 나누며 이날 대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