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용의 환경보건 이야기 ‘환경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23) 법원 인정 첫 공해병 피해자 ‘검은 민들레’
[최예용의 환경보건 이야기 ‘환경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23) 법원 인정 첫 공해병 피해자 ‘검은 민들레’
박길래 이후에 주민들의 진폐증 문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의 10여개 시멘트공장 인근의 1000명이 넘는 주민들에게서 진폐증, 폐암, 만성폐쇄성폐질환 등의 폐질환이 검진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 갖가지 환경보호 메시지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지구의 날 행사가 열린 건 1990년입니다. 그때는 지구의 날 행사를 서울 남산에서 했습니다. 공해병 피해자 박길래는 ‘내 폐를 돌려다오’라고 쓴 작은 팻말을 들고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박길래는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살던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1986년 진폐증을 진단 받았습니다. 탄광의 광부들이 걸린다는 그 직업병 말입니다.
어떻게 대도시의 주민이 진폐증에 걸린 걸까요? 1970~1980년대 서울을 비롯해 전국 대부분에서 난방과 취사연료로 연탄을 사용했습니다. 강원도 탄광에서 채굴해온 탄가루를 도시 곳곳의 야적장에 쌓아두고 연탄을 찍어내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체계였죠. 박길래가 사는 상봉동에는 당시 가장 큰 연탄회사였던 강원산업의 삼표연탄공장이 있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야적장에서 석탄가루가 날려 인근 주거지를 오염시켰고, 주민들은 숨쉴 때마다 탄가루를 마신 겁니다.
박길래는 1979년 상봉동의 연탄공장 인근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겨울마다 감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4~5년이 지난 무렵인 1983년쯤부터는 기침이 심해지고 호흡기 장애가 나타났습니다. 병원에서는 기관지염으로 진단했는데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폐결핵이 의심되어 약물치료를 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국립의료원에서 폐조직 검사를 받았는데 ‘진폐증’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도시진폐증 박길래의 이야기는 1987년 3월 22일 <서울신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그 기사를 쓴 이는 안종주 기자였습니다.
연탄공장 인근서 살다 진폐증으로 진단
박길래의 진폐증을 진단한 국립의료원 흉부내과 장관식 외 5명의 의사들은 <공해지역(연탄공장 주변) 주민에게서 발견된 탄분 침착증 2예>라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결론을 소개합니다. “34세의 주부가 호흡 곤란과 마른 기침으로 진찰해본 결과 X-선상 폐 전반에 걸친 과립성 침윤이 나타났으며 흉강경 검사로 폐표면을 직접 관찰하고 폐조직 생검을 시행한 결과 탄광근로자 진폐증과 같은 탄분 침착증이 확인되었다. 환자는 탄진이 심한 연탄공장 근처에서 8년간 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계속적 탄분 흡입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차제에 이러한 공해지역 주민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요망된다.”
1988년 1월 박길래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웃집 의료보험카드로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같은 해 1월 21일 박길래는 조영래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삼표연탄 강원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합니다. 주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월에만 4차례의 시위가 진행됩니다. 공해추방단체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단체들이 참가한 연대기구도 만들어집니다. 4월에는 상봉동 지역주민에 대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진폐증환자 2명, 의사진폐증환자 3명이 진단됩니다. 그해 8월에는 서울시내에 있는 17개 연탄공장 주민들을 대상으로 역학조사가 진행됐고 직업력이 없는 주민 3명이 진폐증에 걸렸음이 확인됩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서울시 주민 50명이 진폐증이 의심돼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1월에는 서울시가 연탄공장 인근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검진 결과를 발표했는데 모두 1842명을 진찰했고 이 중 50명이 질환 의심 대상, 8명이 폐질환 피해자였습니다. 박길래가 제기한 민사소송은 1988년 1월 서울민사지법 합의13부에서 승소 판결이 나옵니다. 배상금액은 1000만원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로 법원에 의해 인정된 공해병 사례로 기록됩니다. 그해 5월 항소심에서 원심이 확정되었습니다. 인권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조영래의 유고집에서 박길래 이야기가 ‘환경문제는 곧 인권 문제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1989년 5월 피해자들은 서울시장을 면담했고, 서울시 분쟁조정위원회에서 연탄공장 측은 직업력이 있는 피해자는 산재 처리하고 직업력이 없는 시민피해자는 산재보상법에 기준해서 보상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박길래는 이후 적극적으로 공해추방운동에 참여합니다. 1990년 지구의 날 행사에 참가하고, 1995년에는 환경운동가, 법률가들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1994년 환경만화가 신영식이 그린 만화 <하나뿐인 지구>의 9장 검은 민들레 편에서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신영식은 만화에서 왜 박길래가 검은 민들레로 불리는지 실감나게 그려 놓았습니다. 불치의 병이라는 진폐증 진단을 받은 박길래가 고통스러운 상태였을 때, 동네의 전봇대 밑에 핀 작은 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건 까맣게 변해버린 민들레였습니다. 만화에서 박길래는 울부짖습니다. “오오… 민들레야…. 노오란 민들레가 왜 이리로 날아와선 까매졌니… 어쩌면 내 신세하고 똑같니… 으흐흑.” <하나뿐인 지구>의 9장 검은 민들레 편을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공해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환경운동가 조수자, 서울대 교수 김정욱 등이 지속적으로 박길래를 도왔지만 진폐증은 악화됐고 결국 2000년 4월 29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0년 4월 환경보건시민센터 준비위원회는 박길래 추모 10주년 행사를 열고 환경문제로 건강과 생명을 잃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시민단체의 필요성을 확인합니다.
그해 10월 출범한 환경보건시민센터의 공동대표 중 한 사람인 구요비 신부는 현재 서울 포이동성당의 주임신부인데 박길래가 진폐증을 진단받고 투쟁할 때 서울 구로1동 성당의 신부였습니다. 구요비 신부는 신자들과 구로동의 연탄공장 피해 문제, 공해 문제와 싸웠고 이후에도 계속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공해병’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환경성 질환’이란 말을 씁니다. 공해병이란 말이 질환의 원인을 산업 문제에서 찾는 데 비해 환경성 질환이란 용어는 좀 더 포괄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환경운동’이란 말을 쓰지만 예전엔 ‘공해추방운동’이란 용어가 더 많았지요. ‘공해’는 일본에서 온 용어로 공장, 산업 등의 환경오염 원인에 국한해 사용하는 말이라면, 환경에는 자연생태의 문제가 포함돼 훨씬 포괄적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갯벌, 숲, 야생동물, 반려동물, 4대강 보호, 고래 보호 등이 환경운동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으니 공해라는 말보다는 환경이란 용어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공장과 산업으로 인한 건강피해 문제는 ‘환경성 질환’이란 말보다는 ‘공해병’이란 말이 더 어울립니다. ‘석면 공해병’, ‘시멘트공장 공해병’이라고 하듯 말이죠.
박길래 이후에 주민들의 진폐증 문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국의 10여개 시멘트공장 인근의 1000명이 넘는 주민들에게서 진폐증, 폐암, 만성폐쇄성폐질환 등의 폐질환이 검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검은 민들레’ 박길래가 남긴 검은 폐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들레 들레 민들레야 상봉동의 민들레야 필적에는 곱더니만 질적에는 까맣구나 피우지 못한 노란 꿈 안고 다시 태어나거들랑 상봉동에 피지 말고 저 들녘에 피워보렴’
안일순이 노랫말을 지었고 가수 안혜경이 부른 박길래의 이야기 ‘검은 민들레’의 가사입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