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놀 사태' 30년...4대강에 제련소까지, "낙동강은 살고 싶다"
'페놀 사태' 30년...4대강에 제련소까지, "낙동강은 살고 싶다" |
1991년 두산전자, 페놀 2차례 유출→취수장 유입→식수원 시민들 피해...관계자들 솜방망이 처벌 평화뉴스 2021년 3월17일자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8611 낙동강에 유해 화학물질인 페놀이 유출된지 올해로 30년째다. |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 등 국민 1,300만여명이 식수로 사용하는 낙동강은 페놀 사태 이후에도 30년 동안 잔혹사를 면치 못했다. 정권의 개발사업에 기업의 이윤추구 사업까지 논란은 잇따랐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서울 마포 성산시영아프트 페놀 온수 주민대책위원회, 석면피해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16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페놀 사태가 발생한지 30년이 지났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수돗물을 바로 마시는 걸 꺼려한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수돗물이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물이라고 홍보하지만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정수기를 설치하고 생수를 사다 먹고 있다"고 했다.
국민들이 수돗물을 불신하게 된 이유를 30년 전 페놀 사태라고 주장했다. 특히 페놀 사태 후에도 낙동강을 둘러싼 각종 개발사업들이 진행된 것을 언급하며 정부와 지자체, 기업의 자성을 촉구했다. 이들은 "페놀 사태가 벌어진 낙동강 상류 경북 구미보다 더 위쪽인 경북 봉화에 위치한 오염기업 영풍 석포제련소는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여전히 가동되며 낙동가을 위협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으로 들어선 보로 인한 낙동강 '녹조라떼'와 '영주댐'은 볼 때마다 섬뜩하다"고 비판했다.
페놀 사태 당시 대구지역의 시민운동을 주도하며 탄생한 환경단체 대구환경운동연합도 지난 11일 회의에서 "페놀 사태가 일어난지 30년이 됐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낙동강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며 "4대강 보로 막힌 낙동강은 매년 녹조가 창궐하고 있고 식수원 안전도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강이 건강해야 영남인들이 안전한 식수를 얻을 수 있다"면서 "그 길은 강이 막힘 없이 힘차게 흘러가는 것으로, 강이 흐르고 오염원 관리를 철저히 하면 안전하고 식수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페놀 사태 30년이 되는 올해 신음하는 낙동강을 다시 되살려 놓을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전신은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로 지난 1991년 페놀 사태 당시인 9월 14일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지역에서 페놀 사건 관련 환경운동을 주도하다가 지난 1993년 4월 전국 환경단체가 환경운동연합을 조직하면서 대구환경운동연합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낙동강 페놀 유출 사태'는 1991년 발생했다. '대구시 수돗물 사태 시민단체 대책회의 진상조사위원회'가 지난 1991년 5월 2일 펴낸 '대구시 수돗물 페놀 오염사태 백서'에 따르면, 구미산단에 있던 두산전자는 1991년 3월 14~15일, 4월 22일 등 두 차례에 걸쳐 각각 페놀 원액 30여톤과 1.3톤을 낙동강에 유출했다. 페놀은 대구시 상수원 다사취수장으로 유입됐다. 수돗물에서 악취가 풍겼고 시민들이 원인 불명의 건강상 피해를 입었다. 언론 보도로 그 원인이 세상에 알려졌고 여론이 들끓었다. 정부는 조사에 나섰다. 관계부처 공무원과 기업 직원 등 13명이 구속됐고 공무원 11명이 징계 처리됐다. 두산전자는 30일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고의성이 없었다'며 영업정지 20일 만에 조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2차 유출 사태가 발생하면서 피해는 더 커졌다. 검찰은 재조사에 나섰다. 수사 결과 두산전자는 전량소각 처리 명령에도 1990년 10월부터 1991년 3월 20일까지 5개월간 무려 370여톤의 페놀 폐수를 낙동강에 무단 방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환경청 공무원들은 현장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허위 서류를 작성했다. 대구시 상수도 당국도 악취 신고를 받았음에도 원인조사를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두산그룹 관련 OB맥주와 전자기기에 대한 대대적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환경단체들이 만들어지고 환경범죄 처벌법이 제정됐으며 환경 기준이 강화됐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소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공무원들과 기업인들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