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198호] 광복 70년을 계기로 돌아본 한일관계와 석면문제 "한일관계 100년, 석면고통 100년"
2015년 8월 13일에 발표하는 보고서 198호 파일을 첨부합니다.
[목차]
1 요약
2 한일간의 석면문제 주요일지와 피해내용
3 관련 표와 사진: 한일간의 석면문제 관련 표와 사진자료
4 재일한국인 석면피해 사례
Ø 내용문의;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010-3458-7488)
[표, 사진 목차]
l 본문배치순서임,
l 출처;
n 표1, 환경보건시민센터 보고서 64호, 2009년-2호, 2월10일 석면광산문제(1) 충북제천
n 표2, 학술논문 최예용(2013)
n 사진1~4,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n 사진5~7, 일본중피종석면질환피해자와가족모임 센난지부
n 사진8, 부산석면추방공동대책위원회
n 사진9~20, 최예용 촬영,
n 그림1-2, 이성진 디자인,
<표1, 한반도의 지역별 주요 석면광산 명단,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조선을 강제합병한 뒤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캐나다로부터 석면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자 전쟁물자인 석면을 식민지에서 공급하기 위해 1920-1940년 사이에 한반도 전역에서 석면광산을 개발했다.>
<사진1~4> 1930년대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삼정리 소재 광천석면광산의 사진, 일본군복을 입은 사람과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광천석면광산은 한국최초최대, 아시아최대 석면광산으로 불렸다..
<사진5, 센난 석면산업계가 ‘석면호’라는 이름을 붙인 함상전투기를 일본정부에 헌납한 사진, 일본제국주의는 함상전투기를 가미가제 자살공격으로 이용했다>
<사진6, 재일한국인들이 많이 일했던 센난의 한 석면공장에서의 사진. 사진 속 일본인들 사이사이에 김씨, 문씨 성을 가진 한국인들이 여럿 있다>
<사진7, 일본제국주의의 군수산업으로 동원된 석면방직산업 밀집지역 센난과 한난의 석면공장 위치도. 오사카부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전쟁중에 한국인이 징용으로 동원되었고 전쟁 후에는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이 직업을 찾아 센난과 한난에 모여들었다.>
<표2, 일본의 석면공업 밀집지역 센난과 한난에서 한국으로 이전한 석면산업 명단. 주로 부산지역으로 이전했다. 부산은 충남석면광산지역에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많은 석면피해발생지역이다>
<사진8, 부산 연산동에 위치한 석면방직공장 제일E&S(당시 제일화학공업사) 내부와 작업자 사진, 가장 발암위해도가 큰 청석면을 원료로 사용하는 기계가 일본에서 들여왔다. 사진 속 작업자들은 마스크 등 기본적인 안전장비도 갖추지 않고 있다>
<사진9, 제일E&S에서 근무하다 석면직업병인 석면폐에 걸린 박영구씨가 1971년에 제일E&S에 청석면 방직기계를 보낸 일본의 석면회사 니치아스 다츠타공업을 살펴보고 있다. 2008년 촬영>
<사진10, 201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석면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재일동포 석면피해자들이 ‘일한합병 100년, 일한석면피해심각하다.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석면피해문제 적극 해결하라’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11, 2010년 한일합방 100년을 맞아 한국의 광산석면피해자와 일본 센난지역의 재일한국인 석면피해자들이 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인 충남 홍성 광천광산에서 모여 일본정부의 책임을 묻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12, 재일동포 석면피해자 마쯔시카 가나씨(오른쪽)와 한국의 환경성 석면암 악성중피종환자 고 이정림씨(왼쪽, 2011년 사망)가 광천석면광산에서 한일시민사회 교류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사진 2010년>
<사진13, 석면폐환자로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재일동포2세 석면피해자 오카다 요오코씨가 충남 광천지역의 폐석면광산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2010년>
<사진14, 재일동포 석면피해자 오카다 요오코씨(석면폐1급)가 한국 석면광산피해자 정지열씨(석면폐1급)에게 선물을 전하고 있다. 사진 2010년>
<사진15-16, 2014년 일본최고재판소가 재일한국인 다수가 포함된 센난지역 석면피해의 일본정부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2015년 4월 센난지역에 세운 ‘센난 석면의 비’>
<사진17,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모두 석면질환으로 잃은 오카다 요오코씨가 ‘센난석면의 비’제막식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도 석면폐1급 환자이며 일본석면 피해자와가족모임 센난지부 대표를 맡고 있다>
<사진18, 2010년 10월 재일한국인 2세로서 환경성 석면폐 환자인 오카다 요오코가 서울에서 열린 국제 석면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19, 석면폐 환자 오카다 하루미씨가 석면질환으로 사망한 남편 강재희씨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2007년 11월 촬영>
<사진20, 일본석면피해자와가족모임 센난지부 대표 오카다 요오코씨가 오사카현 한난시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서 아버지 강재희씨와 어머니 오카다 하루미씨가 묻힌 가족묘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2015년 4월 촬영>
<그림1, 2012년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석면워크숍 포스터>
<그림2, 2014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일본,인도네시아 3개국 국제석면피해자워크숍 포스터>
1 요약
석면문제의 눈으로 본 한일 관계 100년
2015년 광복 70년을 맞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석면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기적의 광물’과 ‘침묵의 살인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석면은 중요 산업용 광물로 이용되다가 인체유해성이 알려지면서 산업재해물질, 환경오염물질로 인식되고 있다. 석면문제는 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 강제합병으로부터 최근까지 한일관계 100년의 역사 곳곳에서도 인식변화와 피해의 흔적을 남겨왔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물자인 석면을 식민지에서 공급하기 위해 한반도 곳곳에서 석면광산을 개발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에 위치한 광천석면광산은 1930년대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아시아 최대 백석면 광산으로 불린다. 일제는 충남의 홍성, 보령, 청양, 서산 그리고 충북의 제천과 단양 또 강원도 영월과 경북 영풍, 경기 가평 등 남한일대에서 50여개의 석면광산을 개발했고 북한지역에서도 10여개의 석면광산을 개발했다.
일제는 ‘중요광물 비상증산 강조기간’을 설정하고 강제 징용한 한국인을 석면광산 노역에 동원했다. 또한 일본으로 징용된 한국인 수 십만 명은 일본 전역의 광산을 비롯하여 오사카 일대의 군수산업에 동원되었는데 센난과 한난지역의 석면공장에도 동원되었다.
해방 후 남한지역의 석면광산은 방치되다가 60-70년대에 석면경제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시 가동되었는데 외국으로부터의 수입량이 증가하면서 대부분 폐광되었다. 문제는 석면광산 일대가 안전조치 없이 방치되면서 인근 거주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석면에 노출되어왔다는 점이다. 2008-2010년 경에 정부조사에서 주민들의 석면피해가 대거 확인되었다. 부산지역에서의 석면피해도 이 시기에 크게 제기되어 환경단체, 노동단체, 석면피해자 들의 요구로 국회에서 2010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징용 한국인들 중 일부는 일본에 남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석면마을인 센난, 한난의 석면공장에서 일했다. 이는 일본사회에서 재일한국인에 차별과 냉대의 결과이기도 했다. 일본의 석면산업은 군수산업으로서 1950년대 한국전쟁과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전쟁특수를 누렸지만 노동자들의 석면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는 소홀했다. 2005년 일본의 대형 석면공해사건인 ‘구보타쇼크’가 발생하여 일본 전역에서 석면피해가 조사되었다. 센난지역에도 많은 석면피해자가 나왔는데 상당수가 재일한국인들이었다. 이들은 석면피해를 막지 못한 일본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여 10여년체 걸친 소송 끝에 2014년 대부분의 원고가 숭소했다.
1971년 일본 최대 석면회사 니치아스가 청석면 방직기계를 부산에 옮겨 합작회사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년동안 수 십 개의 일본 석면공장이 한국으로 ‘공해수출’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석면공장의 가동으로 부산은 충남의 석면광산피해 다음으로 전국에서 석면피해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
석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활동이 일본에서는 산업보건운동의 주도로, 한국에서는 환경운동의 주도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2005년경부터 석면추방운동을 위한 한일 시민사회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매년 왕래하고 있다.
한국의 석면추방운동가들과 피해자들이 일본 센난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재일한국인 석면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본 쪽에서는 충남 홍성과 보령지역 석면광산일대를 방문하여 피해자간에 교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한일 시민사회는 지난 100년동안의 굴곡진 한일 역사관계 속에 남아 있는 석면문제를 인식하고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다.
2 한일간의 석면문제 주요일지와 피해내용
l 1910년 한일합방
l 1920-1940년대 일제의 한반도 석면광산 개발, 석면광물 일본으로 반출
ð 1930년대 한국최초최대, 아시아최대 석면광산 충남홍성군 광천광산 개발
ð 국내 징용의 형태로 석면광산에 노동력 강제동원. “광천광산 등 홍성, 보령 일대의 석면광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이 많았다.” 정지열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위원장 증언(홍성 광천거주, 석면폐1급 환자)
ð 2008~2010년 충남 홍성, 보령 석면광산지역 일대에서 한국최대 석면피해자 발생확인, 2011년부터 시행되는 석면피해구제제도 도입의 직접적인 배경
l 1937년 중일전쟁,
ð 내선일체로 한국인 징용본격화; “재일 한국인에 대한 강제노역이 실시되어 오사카 지역에 사는 40만명의 재일한국인이 석면방직공장이나 군함 만드는 중공업시설에 투입되거나 간사이공장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었어요.” <석면피해 센난시민의 모임> 하야시 전 대표 증언
l 1945년 광복,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 센난/한난 석면공장지대로 이동
ð “1928년경에 약 4천여명의 한국인이 센난,한난에 거주했고 1945년 전후로는 오사카 전역에 45만명의 한국인이 살았어요. 만주사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이 10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대부분 오사카에 정착했어요.” <석면피해 센난시민의 모임> 하야시 전 대표 증언
l 1950년대 한국전쟁, 일본의 군수산업 석면수요증가
l 1960년대 베트남전쟁, 일본의 군수산업 석면수요증가
l 1964년 한일외교정상화[1]
l 1971년 일본최대 석면공장 니치아스(일본석면) 자회사 다츠타공업, 한국 부산으로 청석면공장 이전; 제일E&S[2](당시 제일화학공업사)
ð 1994년 제일화학 양산공장에 근무 중이던 여성노동자 악성중피종 사망; 한국최초 석면피해 인정자, 한국최초 직업성 암환자, 생존 시 산업재해 신청했으나 사망 후에야 인정됨.
ð 2007년 ‘제일화학 부산공장 근무했던 악성중피종 환자 고 원점순씨 가족에게 석면피해에 대해 배상하라’ (부산지법 판결<span lang="EN-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