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석면공장 퇴직노동자의 삶과 죽음"
환경보건시민센터 보고서 190호, 2015년-1호
2015년 2월13일자
“석면공장 퇴직노동자의 한을 풀어달라”
석면암 중피종환자 정현식씨 사망
20대에 7년간 석면방직회사 다녔는데 퇴직후 22년 지나 52세에 석면암 발병,
회사 폐업하여 산업재해 신청 못해, 2012년 환경성 석면피해구제법으로 겨우 인정,
석면의 위험성 온몸으로 알리고 석면피해자 제도개선 위한 사회적 활동 적극 참여.
2014년10월 세무서에서 회사기록 찾아 산재신청하고 결과 기다리다 2월12일 별세.
환경피해구제금은 산재보험금의 10~30%에 불과,
1994년 첫 인정부터 2013년까지 20년동안 석면관련 산재인정은 200건도 안돼,
반면 2011년에 시작된 환경성 석면피해구제제도는 2015년 1월까지 4년여 만에 1,546명으로
직업성 산재보다 8배 많아, 정현식 사례처럼 환경구제의 절반이상이 석면산업 퇴직노동자.
구멍술술 뚫려 석면공장 퇴직노동자의 석면피해 방치하는 산재제도 뜯어 고쳐야,
유럽 국가들과 같이 환경석면피해 구제수준을 산재보험수준과 같게 하여 차별 없애야.
<사진, 2014년 3월 20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중피종위원회 모임에서. 오른쪽 두번째가 고 정현식씨>
환경보건시민센터 ·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전국석면피해자와가족협회 · 서울대학교보건대학원 직업환경건강연구실
한 석면공장 퇴직노동자의 삶과 죽음
1 1954년생인 정현식씨는 오는 3월초 61세 생일을 맞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1월 초 건강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한달여 만인 2월12일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병명은 희귀암인 악성중피종. 이 암의 발병요인은 석면노출이 유일하다는 것이 국내외 의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악성중피종 환자의 85~95%가 직업적 혹은 환경적 석면노출 때문이며 5%~15%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라고 한다.
2 정현식씨는 60년을 사는 동안 언제 석면에 노출된 것일까? 그가 살아온 환경과 그가 일했던 직업을 되짚어 봤다. 그는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그 부근에서 살아왔다. 1950년대 당시 그곳은 경기도 고양 이었는데 지금은 서울로 편입되었다. 그 일대에는 석면을 다루거나 주변환경으로 노출시킬만한 공장이나 오염원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1973년 군에 입대하여 탄약고에서 근무했다. 제대 후 1976년 지금의 부천시 오정구 신흥로 438번지에 있던 조양산업에 취직했다.
조양산업은 취사기구인 곤로(우리말 표준어로는 풍로 또는 화로)나 난방기구인 난로의 심지를 만드는 회사였다. 지금은 곤로라는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모두들 곤로를 이용해서 음식을 해 먹었다. 곤로 심지는 석유를 빨아들여 타며 열을 내는데 타서 없어지지 않도록 석면을 주 원료하고 유리섬유와 면섬유를 섞어서 만들었다. 공장은 모두 23명 정도가 일했다. 정현식씨는 사무직이지만 배달도 많이 하고 수시로 현장에서 제품 포장 공정에 투입되었다. 포장 작업은 제품 제작공정보다 더 먼지가 많이 났고 늘 뿌연 상태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절반 정도는 마스크를 썼다. 숨쉬기가 힘들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면으로 된 작업복을 입었는데 비옷을 입어 따끔거림을 피하기도 했다. 신발은 장화를 신었지만 모자를 쓰진 않았다. 정현식씨가 일하곤 했던 재단과 포장공정에서는 창문이나 환기시설이 없었고 먼지가 많이 나서 선풍기를 문쪽 방향으로 틀어놓곤 했다. 먼지가 많다고 사장이 자주 돼지고기를 사 먹였는데 겨울철에는 추워서 문을 닫고 지냈다.
<사진, 2014년 10월8일 석면암환자 정현식씨가 불법석면수입고발장을 서울검찰청에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있다>
3 정현식씨는 조양산업에서 30세가 될 때까지 7년간 일했다. 그리고 회사가 문을 닫아서 그만두고 조경회사에서 조금 일했고 1986년에 1년여간 서울 성동구의 건설현장에서 노무관리직으로 1년여간 일했다. 1987년에 결혼한 후에는 2004년까지 시장에서 건어물 도매상을 했다. 이것이 그의 직업이력이다.
4 그가 52세 되던 해인 2006년 6월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숨이 차서 경희대 병원을 찾아 폐엑스레이와 CT촬영을 했다. 병원에서 중피종이 의심된다며 종양내과와 흉부외과 진료를 받도록 했고 흉부외과에서 수술로 조직검사를 실시해 최종적으로 악성중피종암 진단을 받았다. 그가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병명이었다. 이듬해인 2007년에 1차 항암치료를 받으며 8차례 병원에 입원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과 2013년에 2차과 3차 항암치료를 받았고 2014년 1월 4차 항암을 받다가 체력이 너무 떨어져 중단했다. 그 사이 두차례 오른쪽 폐의 일부는 잘라냈다.
5 조양산업을 그만둔 다음해인 1985년경부터 1990년까지 5년간 하루에 6-7개비의 담배를 피웠고 술은 암 발병 전까지 조금씩 했다. 약 20여년 전부터 갑상선 항진증이 생겼고 1년 전부터는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먹어왔다. 형제는 4남인데 부모나 형제들이 특별한 가족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다.
6 정현식씨의 석면암은 그가 석면공장을 그만둔 지 22년 만에 찾아왔다. 공장근무 첫해부터 치면 28년만이다. 통상적으로 석면에 노출된 지 20-40년의 긴 잠복기를 거친 후에 석면질환이 발병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석면노출과 발병은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1986년에 1년 정도 다닌 건설현장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석면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석면공장에서 7년간 일한 직업력이 정현식씨의 석면암을 일으킨 분명한 원인이다.
<사진, 정현식씨의 폐CT사진, 우측 주기관지의 분지 부분에 중피종(원형부분),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의학소견에서 인용. 녹색병원 작성>
7 대부분의 암환자들이 그러하듯 정현식씨도 자신이 왜 희귀암에 걸렸는지 몰랐다. 거듭되는 항암치료를 받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병원비 부담이 큰 걱정이었는데 암투병 5년차인 2012년에 중피종은 석면 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라서 국가에서 지원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젊었을 때 석면공장에 다녔기 때문인가 보다’ 생각했지만 공장이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산재를 신청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해 9월 석면피해구제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8 그리고 얼마 뒤 자신도 중피종환자라며 같은 질환자들끼리 병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석면문제에 대해서 활동해보자고 제안해온 최형식씨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사무실에서 최형식씨를 비롯한 여러명의 중피종환자들을 만났다. 그 모임을 통해 석면이 1급 발암물질이고 사용이 금지되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에 석면자재가 많아 사회적으로 큰 문제이며 피해자들을 위한 제도가 매우 미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몇번의 모임에 참가했는데 2013년 말 자신을 석면피해자모임에 소개했던 최형식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환경단체들이 그에게 환경시민상을 주기로 했는데 몸이 아파 시상식에 못나가니 대신 받아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최형식씨를 대신해 환경시민상을 수상하고 상을 전달해준 며칠 뒤 최씨가 세상을 등졌다.
<2014년 5월, 서울 대학로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사무실에서 열린 중피종 피해자와 가족모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정현식씨다. 중피종 환자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은 2012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석면피해자대회에 참가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등의 피해자들이 들었던 것으로 ‘석면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뜻의 여러 나라 말이다. >
9 이후 정현식씨는 석면추방운동에 열심히 참가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학교와 병원 등 석면문제 현장을 조사하여 발표할 때 피해자로서 참가하여 석면피해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알렸다.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석면피해자들과의 교류에도 적극 참가했다. 일본의 석면피해자들은 정현식씨가 중피종 발병후 7년이 넘도록 생존하면서 석면추방운동에 앞장서는 걸 보면서 신기해 했다. 중피종 환자는 발병 후 평균 1년을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항암치료를 열심히 받으면서 친구들과 늘 산을 찾아 맑은 공기를 마시고 폐기능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2014년 하반기 들어 그의 병세가 심해졌고 외부 활동이 힘들어졌다. 작년 12월 이번에는 그가 환경단체들이 주는 환경시민상을 받게 되었는데 최형식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상식에 나가지 못했다. 감사패는 석면추방운동가들이 집에 찾아가 전달해 주었다.
10 2014년 하반기부터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는 석면병에 걸린 석면공장 퇴직노동자들이 산업재해자로 인정되도록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현식씨의 경우와 같이 대부분의 석면공장 노동자들은 석면에 노출되지만 긴 잠복기 때문에 퇴직한 후에 석면병이 발병한다. 석면사용이 금지되면서 석면공장들은 모두 문을 닫거나 전업하여 그들이 공장에 다녔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불치의 질환에 걸린 후에는 원인을 찾기보다는 치료에 집중하게 되어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다. 돈도 돈이고 가족관계도 엉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산업재해보험을 신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나마 2011년부터 환경성 석면피해구제제도가 생겨 중피종환자를 비롯하여 조금씩 구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환경성 석면피해구제금은 산재보험금의 10~30%에 불과했다. 중피종의 경우 환경성 석면피해구제금이 3천5백여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산업재해보험의 경우에는 회사다닐 때 받았던 급여에 따라 다르지만 1~2억원을 받게 된다. 2014년 국정감사를 통해 알려진 내용으로 한국에서 1994년에 석면암환자가 첫 산업재해를 인정은 이후 2013년까지 20년동안 석면관련 산재인정은 200건도 채 안됐다. 2000년 이전의 기록은 아예 없다고 하고 2000년부터 2013년까지 14년간 모두 169건만이 석면관련 산업재해를 인정받았고 이중 73%가 사망했다. 세계적으로 석면피해는 석면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대부분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보건기구와 국제노동기구는 한해동안 지구상에서 107,000명의 노동자들이 석면질환으로 사망하고 환경성으로는 사망자가 수천명이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 그동안 사용해온 석면원료가 200만톤이 넘는데 석면관련 산업재해 인정자가 200명이 안된다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국내외 석면전문가들로부터 지적된 지 오래다. 반면 2011년에 시작된 환경성 석면피해구제제도는 2015년 1월까지 4년여 만에 1,546명으로 직업성 산재보다 8배나 많다. 정현식씨의 경우처럼 환경성 석면피해자로 구제된 사례의 절반 이상이 사실은 석면산업에서 일하다 퇴직한 노동자들인 것이다.
<사진, 병상의 정현식씨. 2015년 1월18일 경희대병원에서>
11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는 세무서에서 정현식씨가 일했던 조양산업의 기록을 찾아냈다. 그 기록에는 정현식씨가 그 회사에서 일했었다는 월급명세기록도 있었다. 2014년 10월17일 정현식씨는 근로복지공단 부천지사에 산업재해보험 최초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정현식씨는 자신의 61세 생일을 몇 주 앞둔 2015년 2월12일 저녁 8시경 경희대병원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2014년 7월9일 석면암환자 정현식씨가 서울 대학로 환경보건시민센터에서 열린 석면문제조사발표 기자회견에서 석면시료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산업재해자로 인정되기를 학수고대하던 그였다. ‘석면피해 퇴직노동자의 한을 풀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하던 그였다. 자신의 병수발 때문에 가족들이 너무 고생한다며 힘들어하던 그였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가 마련한 수 차례의 석면조사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더 이상 나와 같은 석면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정부와 사회가 노력해야 한다’고 하던 그였다. 석면병 환자와 가족들이 병간호에 지쳐 석면추방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던 그였다.
1월 말 병상에서 그가 ‘암이 목부위까지 퍼져서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부어오른 목 부위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너무 통증이 심하다’라며 힘들어 했다. 그러다가 넌지시 ‘어서 산재를 인정받아 석면병에 걸린 퇴직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1년만 살았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였다. 그가 원하고 바랬다.